1998년 『시와시학』을 통하여 등단한 후 20여 년 동안 8권의 시집을 펴내며 한국문단의 중견시인으로 우뚝 자리매김한 김일태 시인이 새 시집 『파미르를 베고 누워』를 출간하였다.

오랫동안 책임져야 할 일에 욕심내는 동안
언제부턴가 내가 있어야 할 공간에 남들이 들어와
서로 시기하고 다투느라 늘 시끄러웠다.
몇몇 직과 업을 버리자 내속을 헤집던 그들도 떠나고
잠시 주뼛거리던 내가 다시
있어야 할 처음의 자리로 들어오면서
머리가 조용해졌다.

이 시집을 내는 시인의 말이다.
그랬을 것이다. 시인은 최근 10여 년 동안 창원시예술인총연합회 회장, 경남남도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예술문학인들의 권익과 복지향상을 위해 봉사와 헌신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이 의도하지 않게 ‘서로 시기하고 다투느라 늘 시끄러운’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몇몇 직과 업을 버리고 시인이 있어야 할 ‘처음의 제자리’로 돌아와 내면을 직시하는 사색과 지구촌 순례여행을 하며 쓴 깨달음의 시가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이다.

이 시집의 평설을 쓴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는 ‘김일태의 시집 『파미르를 베고 누워』는 질풍노도의 시간을 살아온 시인이 스스로의 제자리로 돌아와 부르는 존재론적 귀환의 고백록’이라고 하면서,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삶의 연륜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한다’ 고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위하여 시인은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마음을 놓고(「방심放心」) 캄차카반도의 비스트라야 강 하구에서 「회향回向」하는 참연어 떼를 보며 ‘푸르게 푸르게 치고 올라가야 할/ 내 환생의 길’을 본다. 크로아티아 자다르 해안 ‘아드리아 노을 지는 해변 콘크리트 세 번째 계단’에서 「바다 오르간」이 연주하는 자연의 음악을 듣는다.

킬리만자로의 3,700m 호롬보 산장을 오르고(「호롬보 산장에서」) 4,500m 고산길을 걸으면서 그 부근에만 자생하는 키 낮은 노란 꽃 「키리만자리」, 그 ‘킬리만자로의 노란 불꽃’을 바라보며 자유와 역사, ‘생과 멸의 경계’를 탐색하며 「(인생)길을 간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 킬리만자로 가는 꼬불한 외길

세상의 모든 밝은 말
어둔 데서 나오고
바른 길도 언제나
꼬불한 길 위에서 만들어졌다

▲ 킬리만자로 네셔널 파크 이정표 앞에 선 시인

길을 간다는 것은
남의 발자국 위에
제 발자국 얹는 일

보아라, 야크 발바닥 가진 마사이 사람들
킬리만자로가 내어준
거칠고 꼬불한 외길
천천히 천천히
경전처럼 읽으며
오고 간다
―「길을 간다는 것은」 전문
 

남미 페루의 고대 잉카문명 유적, ‘첫 절망과 마지막 희망 사이에’ 놓인 그 ‘폐허의 틈새’ 「마추픽추의 적막」 속에서 「바람의 소리」를 듣고, 잉카인들이 마지막까지 스페인 정복군에 저항하면서 쿠스코에 조성한 잉카시대의 석조유물에서 ‘내 나라의 환향여인과 정신대의 어린 소녀들을’ 읽는다(「돌은 녹슬지 않는다」).

중국 감숙성 돈황지역의 월아천과(「월아천에서」), 중국 운남성의 성도 여강麗江을 건너고(「여강에는 강이 없었다」), 크로아티아의 성마르코 성당 가는 캡톨 언덕배기에서 「은빛 시인」을 만나고, 오스트리아의 성 슈테판 성당에서 「성 모차르트를 추억하며」 비엔나커피를 주문한다.

‘먼 사랑 품다 저리 그윽해진’ 슬로베니아의 슬픈 눈동자 블레드 호수(「글썽이는 블레드」),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의 동남아 최고봉(4,095m) 키나발루 고산의 희귀 식충식물 「네펜튜스 라자」, 캄차카반도 고

▲ 파미르고원의 산정호수 야시쿨

렐리 화산(2,381m)의 「암매」에도 시인의 눈길이 머물고, 네팔 카트만두 바그마티강가에서 ‘긴 꼬리 끊고 가는 한 줄기 하얀 영혼처럼 / …… / 죽는다는 것은 그냥 그런 것’(「영생의 방식」)임을 깨닫는다.

그런 깨달음을 위한 이 시집의 마지막 순례지인가. 시인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길을 따라 ‘살아있는 거라고는 출렁이는 물뿐인’파미르 고원의 산정호수 야시쿨(혜초가 고향 계림을 그리워하며 남긴 시로 유명한 3,719m 고지에 위치한 산정호수 ; 시인 역주) 호숫가에 이른다.

시인은 이 파미르고원의 무르갑(파미르고원 동부지역 3,650m에 위치한 타지키스탄의 고대도시 ; 시인 역주)에 들러 무수한 별빛을 이불삼아 덮고 「파미르를 베고 누워」 ‘몽유의 밤’을 지샌다.

▲ 파미르고원 설산과 별빛 하늘

설산에서 쫓겨난 분노의 물길
잠시 쉬어가는 무르갑
강 따라 길 내고
꾸불꾸불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
별빛 덮고 누웠다

그늘도 새의 날갯짓도 한 자락 없는 하늘길 위에서
햇볕과 바람에 찔린 상처가 슬며시
파미르 엉겅퀴 같은 가시로 돋아
모로 누웠는데도 등짝이 배겼다

새벽은 더디고 생각은 사막처럼 쌓이는데
서역 끝으로 데려갈 알라딘의 양탄자는 오지 않고
흙모래바람만 낙타의 슬픈 울음처럼 일었다

소란스런 별빛 온몸 헤집어
세운 귀가 자꾸 가운데로 모아지고
오로지 영혼을 물고 갈 수리 한 마리 기다리는
몽유의 밤

담금질 효과로 단단해져 가는지
늙은 냄새 나는 좁은 침상에서도
아내 코골이는 자신만만하고
― 「파미르를 베고 누워」전문

이러한 시인의 시에 대하여 유성호 교수는 ‘김일태의 시 한 편 한 편은 균질적 성취를 한결같이 보여준다.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서정시가 인간 존재를 합리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파악하는 양식임을 알아가게 된다. 그 점에 그의 시는 서정시가 끊임없이 우리의 현재적 감각을 탈환해가는 예술임을 확인해주는 확연한 물증이 된다.’라고 한다.

그렇다. 이 시집에 실린 시인의 시는 인간존재에 대한 깊은 사색과 성찰을 바탕으로 한 깨달음의 시이다. 죽간으로 내려치는 것 같은 번쩍이는 사유 속에 밝고 평화로운 긍정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의 내면에서 담금질된 긍정에너지가 꽃향기처럼 발산되기 때문일 것이다.

▲ 김일태 시인은 ……

『파미르를 베고 누워』
지은이 김일태
펴낸이 최단아
펴낸곳 도서출판 서정시학
값 12,000원

― 기사제공 // 임재도 부울경뉴스 총괄본부장, 소설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