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

                                                이 서 린

#1
꽃이라 하면 안 되나

#2
세상에 나오려 필사적으로 번지는 저,
스멀스멀 타고 오르는 기억처럼
어둠의 체액을 먹고 자라는 눈물처럼
꺾을 수도 뽑을 수도 없는

#3
이 방이에요, 그 사람이 사라진 장소가

#4
창을 열어도 밖은 벽
빛이라곤 형광등이 전부인 동굴 같은 방
밤마다 환청처럼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
찬 바닥에 귀를 대고 엎드리면
소리 따라 먼 강가에 닿을 것 같아
핏줄이 넝쿨처럼 뻗어갈 것 같아

#5
꽃이라 하자
팽팽한 습기를 빨아들여 무럭무럭 자라는
침묵의 항변
입 속에서도 움트는 지독한 목숨

#6
아무도 침입한 흔적은 없었어요. 문도 안으로 잠겨 있었고 창문은 누가 들어올 만한 구조가 아니고요. 이사 와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몇 번 보긴 했는데 한동안 보이지 않더라고요. 월세가 두 달 밀려서 찾아왔더니……

#7
어느 날 한 사람이 사라진 방에 도배하듯이 만개한
검은 포식자
방 안 가득 뒤덮은 무서운 속도
반 지하에서 그가 보았을 세상의 거리
스스스 자욱한
슬픈 냄새가 숨긴 한 생의 흔적

#8
꽃이 되고 싶었던
한 때는 누군가의 꽃이었던 

* 작가노트

▲ 이서린 시인

눈물처럼 살다 가는 청춘이 있다. 채 피지 못하고 사라지는 삶이 있다.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반 지하에서, 겨우 몸 하나 눕힐 좁은 방에서 웅크리고 자는 슬픈 청춘이 있다. 스무 개가 넘는 아르바이트, 정규직은 꿈조차 꾸지 못하는 현실. 주번의 무관심과 불평등한 혜택. 내일, 또 내일을 기다리다 곰팡이 핀 방에서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떠나는 사람들. 누군가의 사랑스런 자녀였고 형제였고 친구, 동료였을 것이다.

한 때는 그도 피어나는 꽃이었다…….

* 이서린 시인은 199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2007년 《김달진창원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 『저녁의 내부』가 2016년 <세종우수도서 문학 나눔>에 선정되었다. 주책밴드, 시문학연구회 하로동선 동인으로 현재 문학치료강사로 일하고 있다.

* 부울경뉴스 『오늘의 자작추천시』는 부산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에서 활동하는 중견시인들의 자작추천시를 시인이 직접 쓴 작가노트와 함께 소개하는 지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