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를 주유하며
계속되는 역사와 삶의 모순들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302쪽 | 15,000원 “나는 이제 미련 없이 내가 태어나 자란 집, 할아버지가 분신처럼 아낀 우리 집을 해체하기로 한다”

『유산』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친일파 청산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이어지는 한국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친일파 집안과 독립운동가 집안의 대조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과정 속에 우리 민족의 수난사, 윤리적 선택을 가로막는 사회의 모습, 부조리한 시대 속에서 개개인이 겪어야 하는 공포와 고뇌 등을 흡입력 있게 서술하며 친일 청산을 둘러싼 다양한 각도의 문제들을 표면 위로 끌어올린다.

소설의 주인공 이함은 친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즉 조부들의 친일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며,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판사직에 오른다. 반면, 이함에게 처음으로 가문에 대한 궁금증과 의심을 불러일으켰던 김준호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평생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소설은 김준호와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나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이함의 삶을 중심으로 광복 이후 우리 사회에서 친일과 반일의 프레임이 어떻게 작용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됐는지 보여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바르고 정직하게 자란 김준호,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된 이함. 하지만 그녀의 마음과는 반대로 이함의 조상들의 흔적들은 모두 김준호의 비극적 가족사와 연결된다. 이들이 중년이 된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발표되고 이함은 인명사전에서 조부의 이름을 발견한다. 이함은 할아버지가 대동아전쟁 당시 마을의 소녀들을 정신대에 보내는 일에 앞장섰으며 정신대 소녀들 가운데 김준호 고모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목사가 된 김준호는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폐암으로 쓰러진다.

소설은 주인공 이함의 죄책감과 부끄러움, 그리고 심리적 갈등과 고민 등 개인의 서사를 섬세하게 다루면서도, 대한민국 한국근현대사라는 큰 줄기를 놓치지 않는다.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이함의 갈등의 양상은 보다 심화된다. 자신의 둘러싼 환경과 신념 사이의 간극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로 상징되는 가문과 김준호, 아버지로 상징되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고뇌하는 것이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저 탐욕적인 악인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조부에 대한 이함의 망설임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조부는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인물로, 손녀인 이함에게도 훌륭한 어른으로 기억되어 있다. 소설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주인공의 기억과는 상반된 친일파 관료로서의 조부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는 이함의 고민과 갈등에 대한 설득력을 부가한다.

세상의 온갖 권력과 권세를 흡수하던 그곳. 가문의 모순을 깨달은 후손이 선택한 길에서 이 집의 운명은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남겨질 유산은 무엇일까? 소설 『유산』은 역사가 개인의 삶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보여주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우리가 써 내려가야 할 앞으로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삶과 역사 앞에 정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 박정선은 소설 속에서 상징적 소재들을 활용해 친일 청산 문제의 본질이 이제는 우리 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 박정선 작가

박정선 작가는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문학석사)했다. 소설로 영남일보신춘문예 당선, 심훈문학상, 영남일보문학상, 해양문학상 대상,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아라홍련문학상 대상, 천강문학상, 김만중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장편으로『수남이』(2006년 한국예술위 창작지원 선정),『백 년 동안의 침묵』(2012년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선정),『동해아리랑』(한국해양문학상 대상),『가을의 유머』,『새들의 눈물』(김만중문학상), 󰡔남태평양엔 길이 없다󰡕(한국해양문학상 우수) 등이 있으며 소설집으로『청춘예찬 시대는 끝났다』(2015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 『내일 또 봐요』,『와인파티』,『변명』,『표류』등이 있다. 

 - 글 / 조원희, 부울경뉴스 인문학 총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