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마을 아이들

                                                김 성 한

허리 구부정한 촌부가 저녁노을을 등에 업은 채 피사리를 하고 있습니다.

바지춤까지 자란 벼 포기 사이를 돌아다니며 피를 뽑습니다. 불과 달포 전만 해도 연둣빛이던 들녘이 진초록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저 멀리 다리 위로 완행열차가 지나갑니다.

기차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앞뒷산이 등을 맞대고 있는 산골 마을 아이들에게 비행기는 볼 수 있어도 기차는 그림이나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그날은 백일장이 열리는 김천으로 가기 위하여 뒷집 사는 기석이와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교내 백일장에 써낸 작문이 장원으로 뽑혀 학교 대표로 가는 날이었습니다. 여학생도 네댓 명이나 되었습니다. 가방을 둘러메고 집에서 시오리 떨어진 삼거리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흔한 시계조차 귀하던 때라 배꼽시계나 해시계로 버스 도착 시각을 대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가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열병식 하는 군인처럼 줄지어 서 있는 신작로를 따라 트럭이 가고 있었습니다. 흙먼지도 트럭을 뒤따라갔습니다.

드디어 저 멀리 고물버스가 드르릉드르릉 해수병 앓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습니다. 파란 제복에 앳된 얼굴의 차장(안내양)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숙이가 손을 번쩍 들며 옆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같은 반 여학생 숙이도 오늘 백일장에 같이 가기로 되어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숙이, 단발머리에 얼굴이 갸름한 그녀를 보니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 가니 김천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난생처음 이렇게 멀리 오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기껏해야 아버지를 따라 집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고령장에 가본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기차다!”누군가가 지르는 고함이 들렸습니다. 너도 나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철커덕 철커덕’ 시커먼 기차가 스멀스멀 다가왔습니다. 길이가 엄청나게 길었습니다. 꽥 소리까지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기차 위 화통에는 흰색 연기가 솟아올랐습니다. 신기했습니다. 저게 기차구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 저만치 멀어져가는 기차 꼬리에 눈을 뗄 줄 몰랐습니다.

꽥, 들판 너머 다리 위로 열차가 지나갑니다. 벼 포기 사이를 겅중겅중 다니던 백로 한 마리가 기차 고함에 놀라 날아오릅니다. 뇌리 속을 유영하던 추억 한 자락도 백로를 따라가 버립니다.

시계를 보니 오후 7시, 햇살이 산자락을 베고 비스듬히 누웠습니다. 산그림자도 마을 언저리에서 서성거립니다. 오전만 해도 발정 난 삽사리처럼 기운 펄펄하던 햇살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오느라 진이 다 빠진 모양입니다.

어느 책에선가 ‘인생시계’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24시간에 비유하고,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80세쯤 된다 치면 칠순이 코앞인 나는 하루 중 몇 시에 해당하는 걸까요? 대략 저녁 7시가 조금 넘는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열 살이 넘어서야 기차를 처음 봤던 산골 마을 아이들, 그들도 저 비스듬히 누운 햇살처럼 가벼운 몸피에다 얼굴에는 저녁 7시의 그늘이 씌어 있을 겁니다. 다들 어디에서 정붙이며 살고 있는지요. 오늘따라 가슴 저리게 보고 싶습니다.  

▲ 수필가 김성한(金成漢)

김성한 수필가는 경북 성주 출생으로 2008년『문학세계』에 수필로 등단하였으며 포항소재문학상, 공무원연금수필문학상, 매일시니어 문학상, 경기수필문학상을 수상
하였다. 수필집으로『잉걸불』외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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